(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미움받을 용기, 아들러가 삶을 통해 배운 것들

[독후감] 미움받을 용기

친구에게 선물 받아 2016년 4월 29일 서울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읽음

목적론 vs 원인론

아들러는 인간의 행동을 목적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책의 예시를 들어보자.(40) 종업원의 실수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고 했을 때, 종업원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화가 나는 감정이 생겼고, 화가 나는 감정이 원인이 되어 큰 소리를 내개 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원인론의 사고방식이다. 아들러는 종업원을 압박하고 조정하기 위해 큰 소리를 낸 것이고, 큰 소리를 낸 뒤에 그 이유를 분노로 돌린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47)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생활양식은 바로 어떤 목적을 위해 고착된 것이다. 비록 현재의 생활양식이 불만족스럽더라도 이는 적어도 어떤 ‘목적’을 완수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바꾸는데에는 큰 불안이 뒤따른다. 생활양식을 바꾸기 어려운 것은 이런 불안을 돌파할 “용기”가 필요해서이다.(63)

아들러의 목적론을 읽으면서 심리 게임 이론에 yes-but 게임을 떠올렸다. 내담자가 현재 상태에 불만을 토로 하고 상담자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했을 때, 내담자가 그 말이 맞지만(yes)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럴 수 없다(but)고 반응하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생활양식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때문에 존속되는 것이어서 바꿀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쯤 되면 상담자는 내담자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꾸기 싫은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양식을 정당화할 때 쓰는 가장 일반적인 논리가 과거의 어떤 것이 지금의 생활양식을 초래했다는 원인론이다. 원인론에 얽매이면 현재를 바꿀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과거의 일은 바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도 그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는 이것을 ‘핑계’(65)라고 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원인론에 집착하는 것이 현재에 그리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믿는다.

적들인가 친구인가

아들러는 ‘열등감’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인 ‘우월성 추구’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았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자기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생겨난 열등감은 자신의 발전을 가져오지만 , 타인과의 비교에서 생겨난 열등감은 타인과의 경쟁을 유발하고 상대방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고 지적한다.(105-109)

적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내가 삶을 힘들다고 여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성공을 기뻐해주고 누군가를 선의로 도와주는 경우가 줄어든다. 사회는 서로가 친구이기 보다는 경쟁자이길 원한다. 어린시절 어른들로부터 선의를 배풀어야 한다고 배웠지만 커서 걷게된 사회에서는 선의가 이용당하기 마련이라고 학습되었다.

아들러의 지적은 옳다. 적들과 경쟁을 하며 사는 삶은 고되고 불행하다. 타인에게 기여하고 친구가 되는 삶은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선의로 돕는다고 해서 선의의 결과가 돌아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경쟁이 심해질 수록 선의로 돕는 사람은 착한 호구로 취급받고 끝 없이 착취당하기 쉽다. 서로가 서로를 소모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는 정도의 경쟁이 만들어낸, 구조적 불행이자 명백한 인재(人災)이다. 그런 현실에 비추어 보면 아들러는 ‘너를 위한다’는 선의로 착취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거나, 그것을 극복한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고착되어 있는 생각을 우회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적절한 질문’이다. 책에서 적면공포증을 호소하는 내담자에게 철학자는 ‘만약 적면공포증이 나으면 무엇을 하고 싶지?’하고 묻는다. 이 질문을 통해 철학자는 내담자의 목적이 ‘고백의 실패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 이유로 선택된 것이 ‘적면공포증’이라고 추측하게 된다.(75) 또 철학자는 열등감의 본질이 타인과의 비교라를 점을 입증하기 위해 “이 세계에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90)이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만약 …‘으로 시작하는 이러한 질문은 내담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소거함으로써 상황의 본질을 알수 있게 해준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 스스로 찾아간다는 점에서도 유용하다.

사랑, 욕망과 구분하기

책의 철학자는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다(133)”고 하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것은 대부분 욕구인 경우가 많다. 사랑은 ‘다가섬’이나 ‘해줌’보다는 ‘지켜봄’, ‘기다림’ 등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욕구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벌교육의 패해

또 철학자는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준다.”는 상벌정책은 칭찬해 주지 않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고, 벌주지 않으면 부적절한 행동도 할 수 있다(153)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학교 이야기가 아니다. ‘칭찬’ 대신 ‘돈’으로, ‘벌’대신 ‘손해’로 치환하면 자본사회를 잘 설명할 수 있다.

자본시장의 추동력은 ‘자본’ 곧 ‘돈’이다. 돈은 도구로 발명되었지만 곧 목적이 되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사람을 움직일 수 없으며, 금전적으로 손해가 없다면 부적절한 행동에도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좋아하던 일도 돈을 받게 되면 어느 순간 돈을 받아 하는 일이 된다. 즐겁게 만나던 사람도 돈을 받게 되면 돈을 받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 된다. 돈이 끊기게 되면 좋아하던 일이 싫은 일이 되고, 즐거운 만남이 거추장스러운 만남이 된다.

누군가의 파멸을 원한다면 그 사람에게 조금 과한 돈을 계속 주어라.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만날 때 마다 돈을 주어라. 그리고 어느 순간 끊어라.

과제를 분리하라.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내 과제가 아니다’라고 경계선을 정하라. (167)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171)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189)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159)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답은 ‘이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게 될 사람은 누구인가.”(161)로 알 수 있다. 너의 과제에 내가 개입하거나 나의 과제에 타인이 개입했을 때 불행해진다.

비폭력대화에서는 이를 위해 2인칭 대신 1인칭으로 말하라는 방법을 제시한다. “공부하라고 하는 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나는 네가 공부했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성립할 뿐이다. “네가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어”라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네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아파”라는 말이 성립할 뿐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바로 느낄 수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너를 위한 일이야”라는 말이 “부탁이야 좀 해줘”라는 말의 기만적 표현인 경우를 자주 접했다. 나는 둔한 탓에 바로 알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것이 강자가 약자에게 부탁할 때 자주 쓰이는 패턴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자기긍정’에서 ‘자기수용’으로

일부러 적극적으로 자신을 긍정할 필요는 없네.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수용을 해야 하네.(259)

니버의 기도/평온을 비는 기도(Serenity Prayer)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261)

‘평범해질 용기’

인생의 의미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하고는,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네. …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313-314)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318)

“삶의 의미나 이유” 만큼이나 잘못된 질문이 주는 폐해를 더 보여주는 예는 없다. 법륜스님의 말처럼 우리가 던져야할 질문은 “왜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의식이 생명체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박문호 박사의 설명을 잘 이해한 것이라면) 동물의 신경계는 운동을 목적으로 발달해 왔고, 운동을 위해 예측이 필요하며, 예측을 위해 지각이 선행된다. 이 지각-예측-운동을 통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나’라는 의식이다.

나는 어떤 목적이 있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여기에 있을 뿐이다.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내리는 것에 이유와 목적, 지향과 사명을 묻는다면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들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는 부분은 크게 와 닿는다.

하지만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공헌하는 이타심은 자칫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권을 탈취한 지도자는 한 둘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핑계이건 정말이건 간에 이타심 역시 자기 만족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생각한다. 남을 도왔다는 자각적인 뿌듯함이 그런 행동의 동기가 된다고 본다. 결국 이타적인 행동도 이기적인 행동이다.

나는 이타적인 행동이라는 기준 보다는 ‘창조적인 행위’라는 기준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다. 개체의 차이는 있지만 나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에 남다른 즐거움을 느낀다. 여기서 창조란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낳고 기르고 키우는 행위이다. 본능과 관련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이 범주에 들어간다. 하다 못해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행동가들의 열정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나는 고전에서 말한 ‘生生不息’도 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움받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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