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왜 호갱일 수 밖에 없는가

내가 호구일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호구다. (주인장)

누군가가 아낀 비용, 다른 누군가의 부담

내가 사는 Q아파트는 이 지역이 개발된 2000년에 주변 아파트들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제 15년이 넘은 셈이다.

주변 아파트들이 연식이 모두 같은데, 내부는 천차 만별이다. 집을 구할 때 바로 옆의 A 아파트를 가본적이 있는데, 조금 과장해서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수리를 하지 않고는 거의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내부 수리를 한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은 가격도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내가 사는 Q아파트는 이 근방에서는 튼튼히 지었다고 입소문이 난 곳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이사를 오는 사람들이 인테리어(라지만 사실 내부 리모델링이다.)를 새로 한다는 안내문이 엘리베이터에 자주 보인다. Q아파트도 이제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살기는 어려운 연식이 된 것이다.

인테리어를 해서 좋은 환경에 사는 것은 좋지만, 그 비용은 모두 입주자의 몫이다. 애초에 아파트를 내구성 좋게 튼튼하게 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부 수리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면, 이것은 초기 건설사가 줄인 비용을 한참 뒤에 입주자가 어쩔 수 없이 투입하는 셈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공동주택의 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층간소음 문제, 단열이 잘 되지 않아 소모되는 난방비와 냉방비, 이 모두 누군가가 아낀 비용을 훗날 사용자가 대신 내는 일이다.

적당히 망가져야 돈이 된다.

잘 만들어야 좋은 제품이라는 것은 소비자의 환상일 뿐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적당한 시기에 잘 망가져 주는 것이 좋은 제품이다.

자본의 속성 상 만들든 부시든 어떤 이벤트가 계속 생겨나야 부가가치(?)가 창출된다. 처음부터 튼튼히 지으면 초기 투자비용도 많이 들 뿐 아니라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비용도 줄기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다.

적당히 아슬아슬하게 지어서 10년 정도 되어 여기저기 망가지기 시작해야 인테리어 업자도, 집수리 업자도 이득을 볼 수 있다. 또 너무 낡아 다시 지어야 한다면 건설사에게는 또 다시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집을 처음에 튼튼히 지으면 입주자만 웃게 되지만, 적당히 지으면 건설사, 유지보수 업자 모두 웃게 된다. 후자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더 분명하다.

공공의 역할이 줄어야 돈이 된다.

공급자와 수요자의 이해가 엇갈리는 경우는 공공 부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벌써 6년째 D시에 살고 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도 차가 많다 싶었는데, 지금은 평일 낮에도 중심부에는 차가 막힐 지경이다. D시에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가용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내가 이사 왔을 때 가장 놀란 것은 D시 중심부 외에는 버스 배차 시간이 대부분 20분 이상라는 점이었다. 서울에 익숙해 있었던 나로서는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D시 토박이들에게 들어보니,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시가 갑자기 팽창한 탓도 있지만 예전에는 버스가 매우 편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하철이 새로 들어오면서 버스 노선이 바뀌고 배차 시간도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지하철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동선을 미묘하게 피했다는 평가다. 지하철은 지하철 대로 적자고, 지하철로 나빠진 버스는 더 이상 시민들의 발이 되지 못하고 있다.

불편해진 대중교통을 참지 못한 시민들은 자가용을 사기 시작했고, 자가용이 많아지면서 대중교통은 적자를 보게 되었다. 적자 노선을 없애고 배차 시간이 늘면서 사람들은 대중교통 출퇴근을 포기하고 다시 자가용을 선택한다.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가속된다.

자가용이 많아졌지만 도로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옛날의 구도로로는 지금의 자동차 수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다. 외곽 한산한 도로가 아닌 다음에는 거의 다 막힌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차선이 갑자기 없어진다든지, 교통신호가 불합리하다던지, 야간에 왔다면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위험한 구간이라든지 이런 곳들이 적지 않다.

나도 1년간 자가용으로 출퇴근 했는데, 출퇴근 시간에 위험한 구간에서 접촉사고를 자주 목격했다. 늘 사고 나는 곳에서 사고가 재발된다. 상습적인 사고 지역은 지자체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개선되는 속도는 놀랄만큼 더디다.

정치는 대중을 외면하기 쉽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지자체가 앞장서 대중교통의 편의성을 증대시키고 노선을 합리화 하고 배차를 늘려야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대중교통의 역할이 커지면 자가용은 줄어들 것이다. 차를 생산하는 업체, 파는 딜러, 주유소, 자동차 보험사, 보험 설계사, 교통사고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 이 모든 관계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 하는 것은 불특정 대중들 뿐이다.

수적으로는 대중들이 더 많지만, 이들은 특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절실하게 메달려 문제 제기를 하지도 않는다. 교통이 편리해졌다고 투표에서 표를 행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 당사자들은 어떤가. 수적으로 더 적지만, 자기의 입장이 분명하고 더 강하게 이익을 관철시키려 한다. 또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표를 행사한다.

나는 여기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이 사회의 단면을 본다. 정치가라면 다수에게 약간씩 돌아가는 이익을 이야기 하기보다는 소수에게 눈에 띌만한 이익을 주겠다고 공약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그 소수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치가를 후원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설득하고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과정에서 특정되지 않은 대중은 소외된다.

대중의 한 사람인 나는,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시장에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줄인 비용을 감당해 가며 호갱으로 살아가고 있다.

약자들에게 협동이 미덕이 되고, 강자들에게는 경쟁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장이 다양화 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소비자가 선택권이 넓어질 수록 공급자의 이익은 수요자의 그것과 닮아 간다. 수요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수요자들이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살기 좋은 지자체로 이사하게 될 것이고, 더 내구성 좋은 아파트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경쟁자들도 그러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예전에 미국에 잠깐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오래된 캠리가 많이 보였다. 동행한 분의 설명으로는 일본 자동차 회사가 초기 미국에 진출할 때 내 놓은 제품들인데, 어찌나 튼튼하게 만들었던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가며 대대로 쓴다고 한다. 너무 오래 타서 실증이 나면 고장나면 바꾸리라 기다려도 고장이 안난다고. 이런 명성 덕분에 일본 자동차 회사가 미국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낮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았던 Microsoft의 Internet Explorer도 Google의 Chrome이 나오자 업데이트가 되었고 급기야 Edge로 변신하게 되었다. 요즘은 오히려 Chrome이 좀 무거워지고 있다는 평이다.

우리 나라에서 캠리나 Edge 같은 예가 있을까? 거대 기업들이 경쟁해서 내 삶이 더 편리해 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경쟁은 약한자들의 전유물이다. 강자들은 거의 경쟁을 하지 않는다. 큼직 큼직한 시장이 사실상 독과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담합을 했든 하지 않았든 대중들의 삶이 더 좋아질 이유는 없다.

사회가 건강해 지려면 약자들에게는 협동이 미덕이 되고, 강자들에게는 경쟁을 요구해야 한다.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찾아왔다. 지지난 여름, S사와 L사의 비싼 에어컨을 사지 않기 위해 꽤 발품을 팔았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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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누군가 기획한 일이라면 대단하다. 만들 때 부술 때, 먹고 또 먹는 게임 아닌가. 병주고 약주는 이런 장사에 투입될 자원으로 더 많은 아이들에게 무상 급식을 주었다면, 결식아동들에게는 방학 때도 도시락을 지원해 준다면 어땠을까.

이런 상황에서 나는 아이에게 “현실은 이렇지만, 그래도 사회에 공헌해라”라고 가르쳐야 할까? “현실이 이런거야, 돈은 이렇게 벌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까.

과연 복지 논쟁에서 단골로 나오는 모럴 헤저드,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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