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콩밭에서는 팥이 나지 않는다. 콩이 날 뿐이다. (주인장)
Prologue : 츄리닝
회사에서 나는 연구를 주로 맡고 있다.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근무하고 외부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별로 없다. 평소 땀이 많아 여름이면 츄리닝을 좋아하는 편이다. 땀이 덜차고 허리도 넉넉해서 오래 앉아 연구하기에 더 없이 편한 차림이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 예전처럼 츄리닝을 입고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식사 시간이나 오가던 사람들이 보고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장과 면담을 하고 너무 눈에 띄지 않는게 좋겠다는 충고를 받았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더이상 츄리닝을 입지 않게 되었다.
이후 나는 회사에서 나의 옷차림을 스스로 검열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출근길에 비가 와서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몽땅 젖어버렸다. 다행히 실내에서 싣는 슬리퍼가 있었지만 맨발로 신고 있어야 했다.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있으려니 누군가의 눈에 띌까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나는 주변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사람들은 나의 츄리닝 차림에 어떤 불만이 있었던 것이며, 왜 그들은 직접 나에게 유해
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암묵적 억압 : 튀지 말라
얼마전 우리나라 굴지의 S사에서 직원들이 반바지를 입을 수 있도록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떠어떠한 옷을 입어달라고 직원들을 설득하는게 아니라 어떤 옷까지 괜찮다고 허가한다는 내용에 실소가 났다. 개인의 자율 영역인 복장까지 규제하는 것은 회사의 월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거의 제복이라고 봐도 좋겠다.
본디 제복이라는 것은 이른바 “조직”의 표상이다. 상하 위계가 확실하고 상명하복이 철칙인 군대가 대표적인 예이다. 제복은 개인보다는 전체, 권리보다는 의무, 자율보다는 복종, 그리고 충성과 의리라는 Social Context를 형성한다.
남성 정장의 상징인 넥타이는 군대에서 기원하여 패션 아이템으로 널리 퍼졌으며 현대에는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 주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동시에 조직, 규율, 충성, 격식, 예의범절의 상징이기도 하다.
스스로 검열 : 무채색 자동차들
얼마전 점심에 산책을 하다가 회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들을 보고 동료가 전부 무채색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주차된 차들이 전부 흰색, 검정색, 회색 계열이었다.
이어 동료는 A자동차 초창기 카다로그를 보았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색깔의 차들이 출시되어서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몇년 뒤 카다로그에는 색깔이 많이 줄었다고. 90년대 말에서 최근까지 자동차 카다로그에 나오는 색깔 변화를 같은 기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회 현상들과 연관시켜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무채색에 대한 선호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획일성, 튀면 안된다
는 자기 검열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 살아가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 말이 참 잘 어울리는 사회이다.
모두가 제복을 입었는데, 나만 옷차림이 다르다든지, 모두 넥타이를 했는데 나만 그렇지 않았다면 눈에 금방 띄고 만다.
우리사회에서 두드러짐은 관심과 주목이 아니라 구설수와 뒷담화로 이어지기 쉽상이다. 사회 초년생이 조직 생활에서 얻는 첫번째 교훈은 너무 잘해도 안되고 너무 못해도 안되고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들과 다를 때 찾아오는 큰 불안이 찾아온다. 아마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모두 제복을 입어야 한다면, 나도 제복을 입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가 있다면 봐야 하고, 요즘 아이들이 사이에 인기 있는 장난감은 내 아이에게도 사주어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개인을 튀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 억압에서 탈피한 존재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개인으로 존재하려는 시도는 늘 봉쇄당하기 쉽다.
Epilogue : 너만 왜 그러니?
너만 왜 그러니?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릴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말이다(또 다른 말로는 너 몇년생이야?
가 있다).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 없지만 상대방을 제압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외국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이 말을 들은 한국 사람의 반응은 크게 2가지이다. 슬금슬금 물러서기, 혹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흥분하기. 양자 모두 튀지 말라는 이 말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결과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사회가 개인을 잉태하기를, 그래서 개인이 탄생하기를 바람한다.
사족 : 튀지 않으면서 창의적이 될 수 있을까?
자동차가 무채색이든, 회사에서 복장을 강조하든, 일관성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불어온 창의성
열풍은 상추쌈에 생크림을 넣어먹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모난 돌이 정을 맞고, 튀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처럼 살아야 생존 가능성이 큰 사회에서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경험을 추구하며 그래서 남들과 다른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개인들을 들볶기 시작했다.
그게 될리가 있겠는가? 그건 마치 콩 심은 곳에서 팥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