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하다.

옥아,

왜 인간은 고뇌하는 것일까.

인간의 마음은 머물 줄 모른다. 원숭이가 이 나무 저 나무를 오가듯, 인간의 마음은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떠돌아 다닌다.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하고 싶다고 그것에만 집중되지도 않는다. 마치 나이지만 내가 아닌,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그 무엇이다.

그래 “떠돌아 다닌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마음은 언제나 떠돌아 다닌다.

어떤 사건에 직면하게 되면 살랑거리며 떠돌던 마음은 폭풍이 되어 세차게 몰아 친다. 그것이 고뇌다. 고뇌한다는 현상 마저 고뇌의 대상이 되고, 고뇌를 멈추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뒤에 몸과 마음이 지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야 세차게 몰아치던 마음은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아이러니다. 멈추려고 하면 멈추어 지지 않고 멈추기를 포기해야 비로소 멈춘다.

옥아,

고뇌는 인간이 발전시킨 지능의 부작용인 것 같다.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 밖에 취할 수 없다. 환경에 순응하거나 환경을 통제하는 것이다. 인간은 후자를 택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능을 발전시켰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반추해 현상의 원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해 미리 대비하기 시작했다. 지능을 발전시켰던 인류의 선택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인류는 지구상에서 유래 없이 번창했다.

과거의 경험을 곱씹는 것, 미래의 일에 대비하는 것.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뇌에게 부여한 사명이다.

언제부터인가 인류는 스스로 이런 특성을 발전시켜 “과학”이라는 방법으로 체계화 시켰다. 과학이 권장되는 사회에서 교육은 어린 인간들에게 끊임 없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과학과 기술을 대표하는 이 질문이 인간 종족 번성의 핵심 전략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 개개인은 자연 현상에 물어 왔던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고 만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지구 상의 어떤 생명체도 자기 존재에 대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사자가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기린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그런 이유 따위는 없다. 단지 우연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잉태된 현상일 뿐이다. 이 많은 우연 가운데 어떤 조각만 결여 되었더라도 우리가 보는 사자나 기린은 없었을 지 모른다.

‘나’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온전히 하나의 자연 현상일 뿐이다. 질문을 해도 답이 나올리 없다. 그래서 잘못된 질문이다.

대부분의 고뇌들은 이렇게 잘못된 질문에서 비롯된다.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제 일을 반추하고 내일 일을 걱정한다. 어쩔 수 없다. 지난 일의 이유를 알아내고 미래를 예측하여 순응하거나 통제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뇌가 끊이지 않는다면, 이왕 그렇게 된 바에야 더 깊이 밀어 넣어 보자. 더 깊이 고뇌함으로써 인간임을 뼈저리게 실감해 보자. 고뇌를 야기한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고 질문해 보고, 이 질문이 정당한지 다시 꼬리를 물고 질문해 보자.

피할 수 없어 즐겨야 할지라도 고뇌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질문에 얽혀들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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