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큰아들 이펙트`는 더 이상 없다.
낙수효과와 인구절벽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가 풍미했고, 그런 이유로 낙수효과라는 단어가 대중에게도 친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10년이 지난 지금, 소득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고 사람들의 삶의 질은 더욱 떨어졌다. 온 나라가 힘을 합하여 밀어준 대표 기업들이 돈을 벌었으나 “낙수”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기대하던 “낙수” 대신 찾아온 것은 자발적 불임, 즉 인구감소이다. 대한민국의 출생율은 계속 감소하여 왔고, 올해도 최저치를 갱신할 듯하다. 내 주변에도 미혼이거나 결혼은 했으되 아이는 낳지 않는 집이 많다.
지인들과 이야기해 보면, 아이가 고귀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회가 원하는 “개, 돼지”를 공급하고 싶지 않다는 인식이 많다. 언론의 논조나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이런 문제의식이 없어 보인다. 국민이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국가의 노동력 감소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식이다.
‘큰아들 이펙트’의 배신
나는 우리 사회를 “큰아들 이펙트”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하고 싶다.
얼마전까지도 우리나라는 큰아들에게 한 집안의 모든 자원을 몰아주고 노후를 보장받는 체제였다. 동생들은 초등학교만 나와도 큰아들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시켰고, 공부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보내졌다. 물론 그렇게 성공한 예도 있다. 장성한 큰아들이 동생들을 건사하고 부모를 봉양하였던 것이다. 집안 구성원들이 희생하면서까지 큰아들을 성장시키면 그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이 바로 “큰아들 이펙트”이다.
경제성장기에 우리 사회를 견인했던 대기업 주도의 성장 방식도 대단한 아이디어 같지만 가족 단위에서 이루어지던 이 큰아들 이펙트의 확장판일 뿐이다. 신자유 주의에서 제창한 낙수효과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질 수 있었던 것이 이러한 사회적 경험치 때문이라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하지만 이 큰아들 이펙트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큰아들이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나의 성공이 나 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큰아들이 그간의 성공이 자기 자신만의 공이고 가족들의 희생은 스스로 좋아서 한 것이지 자기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내가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오늘도 고생하고 있으니 자신은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큰아들 이펙트는 작동을 멈추게 된다.
전쟁의 폐허에서 지금의 경제 대국이 된 공을 모두 이 사회의 큰아들, 즉 대기업에게 돌리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서 큰아들 이펙트가 어느정도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이제는 큰아들 이펙트에 대한 사회적 환상이 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큰아들 이펙트가 존속하기 위해 필수적인 상호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대기업들은 사회 희생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 국가와 국민들은 그들을 우리 사회의 큰아들이라며 희생을 감수하고 성장시켰지만, 그들은 성공은 스스로한 것이며 그 열매는 자신들만의 것이고 자신들은 경제를 성장시키므로 특권층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 징후들은 편법 경영권 승계 문제(박근혜 정권 몰락으로까지 이어진 삼성 경영권 승계문제), 어처구니 없는 발언들과 행동들(땅콩회항, 맷값 폭행, 직원 구타)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런 여건 속에서 큰아들 이펙트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다수가 대기업을 지원해도 그 열매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열매를 독점하여 다수의 성장을 저해하기까지 한다.
또 한가지 환기해야 할 것은 큰아들 이펙트는 가난한 시절의 논리라는 점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큰아들 이펙트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했다. 형제 자매 모두 대학에 보내도 될 만큼 집안 형편이 좋아졌다는 뜻이다. 굳이 큰아들에 의지하지 않아도 집안 구성원들이 모두 자기 재능을 펼치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큰아들 이펙트, 한 때 우리 사회를 움직였던 원동력이지만 이제는 좋은 추억으로 남겨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