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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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첫 번째 죽을 고비에서 불운하게도 죽은 사람 뿐일 것이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행운아는 아니더라도 결코 불운하다고 할 수 없다.
나 역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가운데 빈도가 가장 높은 종류는 단연 “자동차”이다. 나의 경험만이 아니다. 질병을 제외하고 자살 다음으로 높은 사망 원인이다. 질병을 포함시켜도 상위 10위권 내에 당당히 들어 있다. 이것도 10년전에 비해 낮아진 수치이다. (2015년 사망원이통계 기준)
나 역시 자동차 때문에 3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불행히도 3번 모두 달려오는 자동차를 정면에서 목도했기 때문에 자동차에 대한 두려움이 각별한 편이다. 너무 느리게 진화가 작동하는 덕분이지만, 필경에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사자나 호랑이를 두려워 하듯이 자동차를 두려워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은 자동차에 대해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자동차 밖에서는 자동차에 대해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자동차 안에서는 반대로 안정감을, 더 나아가서는 전능감을 느낍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질병이나 자살 문제는 심각하게 반응하면서도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거나 무감각하다고 느낀다. (심지어는 수백명이 일시에 죽은 세월호 사건도 “교통사고일 뿐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교통사고라면 그 많은 사람이 죽어도 되는 것인가?) 만약 어떤 질병이 자동차 사고 만큼 많은 사상자를 낸다면 보건당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하고 있는 노력은 음주단속 정도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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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목숨을 잃을 뻔 한 나의 경험은 불과 이틀 전 새벽에도 있었다. 이 글도 그 사실을 기록해 두고자 쓰고 있다. 출장이 늦어져 목요일 밤, 정확히는 금요일 새벽에 집 근처에 도착했다. 편의점에 들르기 위해 사거리에서 택시에서 내린 나는 보행 신호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 주거지역이여서 새벽에도 신호등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가로등도 환하게 보행자를 비추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반 쯤 지나 사거리 한 가운데를 지날 즈음 12시 방향에서 흰색 SUV 한 대가 좌회전을 하기 위해 사거리로 진입했다. 보통 새벽에는 신호등을 무시하는 운전자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도 보행자가 건너고 있는데, 매너가 좀 없다고 생각하며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차량은 각도를 틀어 속도를 내더니 나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혹시나 해서 걸을 재촉해 자리를 옮겼다. 그 차는 아슬아슬하게 나를 지나쳐 달려갔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달리는 차의 뒤꼭지를 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운전자는 나의 적의를 느꼈는지 차를 새우더니 유리창 넘어 뒤에 있는 나를 확인하고는 미안하다고 했다.
추측컨대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달리다가 사이드미러로 뒤늦게 나를 확인하고 아차 싶었던 듯하다. 차 전방에 사각이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아마 음주 상태였거나 핸드폰으로 통화를 나누고 있었겠지 싶다. 나는 너무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 없이 물러서 나왔다.
다음날 아침 경찰서에 이런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질의를 했으나 다치지 않았다면 별 도리가 없다는 대답을 받았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는데, 찔리지 않았으니 그를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 아닌가. 답답한 마음에 다치기라도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통법규 위반으로라도 신고하고 싶었지만, 제보자가 증거를 주어야 한단다. 뭐 이런 시베리아 같은 …. 하지만 당시 나는 보행상태였기 때문에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도 없었고, 주변에 CCTV 영상을 확인할 권리도 없다. 분하지만 다시 소시민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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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을 위해 인간이 하는 전형적인 행위, 즉 합리화를 해보기로 했다. 이 불행한 일의 좋은 측면은 무엇일까. 몇 개월 째 나는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출근한 다음 날에는 그 스트레스가 상당히 미미하게 느껴졌다. 영원히 살 것처럼 더 얻으려 하고 덜 잃으려 애쓰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구나. 머리로 아는 이런 사실을 몸도 잠시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생물에게 죽음은 분면 불행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굳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죽음이 있어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합리화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효과적이다. 그런 합리화로 시간을 번 인간은 더 오래 살기 위해 그 소중한 순간을 기꺼이 소모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마치 여우가 울타리 안에 있는 포도가 시어서 먹을 만 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당히 근면하게 울타리 밑에 굴을 파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