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쌓다.

자애 명상, 그리고 덕을 쌓다.

옥아, 세상은 말 그대로 내 맘 같지 않다.

세상은 정해진 길이 없고, 사람들은 내가 생각치도 못한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간다. 다 된 듯한 일도 상황이 변하여 성사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안 될 것 같은 일도 어찌 어찌 되는 경우가 있다.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살던 사람이 작은 실수로 실각하는 경우도 있고, 주변 사람이 마음 조릴 정도로 마구잡이로 살아도 무탈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은 이라고 말한다.

옥아, 나이가 들면서 인생에서 요즘 이라는 녀석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중이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에 맡겨진다. 어떤 집에서 어떤 부모를 만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씨앗이라도 척박한 땅에 떨어져서는 싹을 잘 자라날 수 없다. 타고난 얼굴도 바꾸는 시대라지만, 인간은 자신이 심어질 땅을 스스로 고를 수 없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사람들이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삶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라기 보다는 운이 좌우하는 부분,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요소를 덮어둘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은 내버려 두고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자는 전략이랄까.

하지만 완전히 포기했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의 영역마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인생의 7할이나 차지하는 의 영향력을 미지의 영역으로 둘 수 없기 때문이리라. 신에게 기도를 하고, 조상 묘를 고치고, 궂을 하고, 기부금을 낸다. 나는 이런 행위를 “덕(德)을 쌓는 행위”라고 통칭하고 싶다.

덕을 쌓는 행위가 어떤 작용을 거쳐 자신에게 운을 가져다 주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덕을 쌓는 행위는 비록 나를 위한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고 있지만 이타적인 모양세를 취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배풀어야 돌아온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을 위하는 행동은 어딘가에 덕을 쌓게 되고, 그 덕이 모여 나에게 좋은 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공동체 전체로 보았을 때 그리 나쁘지 않다.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많은 구성원들이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데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최근 나는 덕을 쌓는 행위 가운데 불교의 자애명상에 관심이 생겼다.

불경에 자애명상의 효과로 거론한 것 가운데 하나가 숙면을 취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닐가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늘 어느정도의 불안을 가지고 살고 있다. 메스컴에서 나오는 무시무사한 사건들을 보면 지나가던 차가 우리 가족을 덮치지는 않을까?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지진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곁을 지나던 사람에게 묻지마 폭행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걱정을 하게 된다. 나의 문제라면 오히려 잊고 지내겠지만, 나의 가족에게는 그런 걱정이 줄지 않는다.

만약, 자애명상의 바람처럼 모든 존재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존재가 된다면 이런 문제들은 기우가 되고 만다. 설령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도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삶에 의지할 것은 나 자신 뿐이라는 생각은 마음의 여유를 앗아간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은 더욱 그런 경험을 강화시킨다. 주변 사람의 행복까지 마음을 넓힐 수 있다면, 나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그런 태도로 생활하게 되면 점차 너와 나의 행복에 기여하게 되는 경험을 강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이라는 변수를 아직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느니, 기회를 잘 노려야 한다느니 하는 세속적인 이야기들을 모두 수긍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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