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은 생존 한계선이다.

사람들은 가격이 재화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자주 착각한다. 그러나 가격은 희소성에 대한 기준이고, 가치는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한 가치이다. 따라서 양자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상투적인 비유지만, 금과 쌀을 비교해 보자. 가격은 금이 더 높지만 인간에게는 쌀이 더 필요하다.

임금도 마찬가지이다.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 높은 가치가 있고 낮은 임금을 가진 사람이 낮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임금은 사회적 계약일 뿐이다.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사람들이 선호하는 자리가 있다. 누군가는 그곳에 앉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이 더 능력이 있고 우월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시간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뿐이다. 노동의 자리 역시 이와 유사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냉정해가 생각해 보자. 모든 기억을 되돌린 채 내가 나의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지금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활률적으로 무척 낮다. 지금 우리의 삶은 무수한 우연이 거듭되어 이루어진 무척 희소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임금과 개인의 가치, 일의 가치는 별개의 문제이다. 내 임금의 100배를 버는 사람은 나보다 100배 더 일한다거나 100배 더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없다. 굳이 그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들의 임금은 그들이 감내했던 리스크에 대한 리턴, 현재 짊어지고 있는 책임의 댓가이다. 노동의 댓가는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획일적인 분위기여서 상당수의 “長”은 누가 와도 문제 없게 디자인 되어 있다. 극단적으로는 국가 통수권자나 대기업 오너마저도 누가 되든 한동안 조직은 문제 없이 굴러간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생긴다. ) 이런 사회에서는 더더욱 임금을 가지고 개인의 우월함과 열등함을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에서 임금 규모는 한 노동자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소득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지고 거꾸로 추산해 가는 편이 옳다. 어차피 임금이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가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5년을 기준으로, 서울에서 1인가구의 한 달 생활비는 135만원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평균 생활지가 적정 생활비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거칠게나마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서울의 최저 임금은 8437.5원 정도 되었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한 가족이 아니라 1인 기준이기 때문에 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최저임금이 진통 끝에 7,530원으로 확정되었다. 입장에 따라 호불하고 갈릴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직 한참 더 올라야 한다. 노동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 하루 8시간 최저임금을 받고 일을 했을 때 한 가족은 아니더라도 한 개인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최저임금 7,530원으로 하루 8시간 한 달 20일 일 했을 때 1,204,800원을 벌 수 있다. 한국의 높은 주거비와 물가를 고려했을 때 이 최저임금으로는 성인 한 명이 독립해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임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임금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일 뿐이다. 그 합의는 서로가 서로를 저울질하며 평가하는 방향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마이니 이정도 임금은 서로 주자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단순하고 일시적인 아르바이트라도 꾸준히만 하면 풍족하지는 않지만 자기의 삶을 유지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더 노력하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런 뒤에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자고 말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해고가 곧 살인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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