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조(返照), 나 자신을 보다.

경계에 마음이 부딪히면 감정이 반사되어 나온다. 감정을 통해 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까.

우선 전제해야할 것은 ‘나’가 ‘나’를 관찰하는 것은 ‘나’가 ‘너’를 관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식사를 한 후 이에 낀 것이 없는지 알기 위해 거울을 본다. ‘너’가 나의 이를 보듯이, ‘나’도 나의 이를 봐야 상태를 알 수 있다. 타인을 관찰할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부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 뿐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 것 같지만, 면밀히 주의를 두고 관찰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배가 아픈 환자가 자기 몸이 아픈 이유를 의사에게 물어본다. 의사로부터 혹시 오래된 음식을 먹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다음에야 마음에 짚이는 곳이 생긴다.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도, 부끄러워 하고 있다는 것도,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도 스스로에게 솔직한 상태에서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관찰해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사실 타인에게 나의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행위가 그에 해당한다. 특히 경험이 많고 지혜 깊은 사람이라면 스스로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더 잘 말해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가 ‘나’ 스스로를 살필 때 압도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환자가 되어 보자. 내가 불편한 것을 상대방이 잘 알 수 있을까.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러기 어렵다. 나의 느낌 감정은 나만이 온전히 알 수 있다.

이처럼 나를 관찰한다는 것은 타인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오로지 나 자신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관찰의 주체는 내가 아니어서는 안된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내 마음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까.

관찰에는 관찰의 주체관찰의 대상, 그리고 매개체가 필요하다. 인간이 대상지각한다는 것은 감각 기관이 매개체를 통해 관찰 대상을 감지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본다고 해 보자. 이것은 관찰 대상인 사과를 감각 기관인 눈이 빛을 매개로 감지하는 사건이다. 이것을 나의 마음에 적용시켜 보면 관찰 대상은 나의 마음이고, 감각 기관은 느낌을 감지하는 내부감각이다. 그 감지 결과가 바로 감정이다. (매개체를 굳이 따지자면 신경자극과 신경전달물질이라고 해야할까. )

빛을 받아 우리 눈에서 여러가지 색이 느껴지듯, 경계에 놓인 우리 마음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감정이다.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어 감정이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매개체를 감지한 것이다.

나의 마음도 알고보면 외부의 개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마음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감정을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하고 모습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불꺼진 방안에 놓여있는 물체와 같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물체를 보려면 빛을 비추어야 하듯이 마음을 보려면 마음이 반응하는 상황에 놓여야 한다. 그러면 반사된 빛을 눈에서 감지하듯 마음에서 반사해 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불쾌한 감정이든 유쾌한 감정이든, 감정이 나타나는 경계에 자기를 놓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타나는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바로 그 때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반사적으로 감정을 재빨리 덮거나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노력을 알아차리고 중단해야 한다. 모처럼 방안에 들어온 등불을 잘 활용해야 한다. 이제 감정을 통해 마음의 모습을 더듬어 본다. 어떤 녀석인지 말이다. 습관처럼 눈으로 보듯 마음을 형상화 시키려 한다면 그런 반응도 멈춰보자.

이렇게 마음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경계해야 할 점은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마음을 부정하거나 충분히 살펴보지도 않고 다른 모습을 바꾸려는 행위이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잘 멈춰야 한다. 이것을 멈추지 못하면 마음을 볼 수 있는 순간의 기회는 다시 사라지고 만다.

감정을 통해 마음이 드러났을 때 아무것도 하려 해서는 안된다. 흡사 비누방울을 보는 것과 같다. 사라지게 하려는 노력 뿐만 아니라 지속시키려는 노력까지도 해서는 안된다. 그냥 놓아 두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가장 오래 지속시키는 비법이다.

명상이 깊어지면 감정보다 더 미세한 반사광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불가에서 그것을 반조(返照)라고 했으리라. 감정이 거친 반사광이라면 반조는 미세한 반사광일 것이다. 반조가 가능하다면 경계에 자기를 놓지 않아도 더 자기 마음을 더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칠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범부에게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통해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를 알기에 충분하다. 오히려 조용한 곳에 앉아서 하는 것만이 수행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쉬운 길을 놓아두고 어려운 길로 가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큰 칼로 듬성 듬성 잘라 놓고 작은 칼로 다듬으면 일이 쉽다. 평소에 경계 속에서 감정을 통해 마음을 보아 둔다면, 명상을 통해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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