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는가

진(gene) 혹은 밈(meme).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불현듯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꽂혀 몇 개월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삶이라는 배경 앞에 놓여진 존재로서의 ‘나’를 인식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었으리라. 질문은 문자 그대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을 자면서까지 생각하는 날도 있었다. 불가에서 화두(話頭)를 수행하는 기분이 그런 것이리라. 그때 좋은 스승을 만났다면 깨침을 얻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3-4개월 그렇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 이내 머리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신기하게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여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던 질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히려 일부러 생각하려 해도 전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사춘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찾은 답이 무엇이었을까. 아쉽지만 밝히지 않을 참이다. 다분히 순수했던 시절의 순진했던 생각이라고만 밝혀 둔다. 그 때의 해답은 분명 당시 나에게 최선의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당시의 해답은 더이상 나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 후로도 때 만큼은 아니지만 때때로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곤 했다.

한동안 해답을 찾아 헤매던 나는, 수년전에 마침내 성인 버전의 해답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 해답은 “진(gene) 혹은 밈(meme)”이다. 진(gene)은 생물학적 피조물을 의미하고, 밈(meme)은 사회적 피조물을 의미한다. 스스로 찾았다기 보다는 진화생물학자들이 알려준 것이지만, 이 해답은 현재의 나와 내 주변을 잘 설명해 준다.

진은 자손이다. 나의 아이.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아이에게 헌신적이며, 아이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인생의 경험을 얻는다.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자연이 내 존재의 목적을 적어도 한가지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손을 생산하라는 것일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간과하기 쉬운 것은 밈(meme)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은 창조 행위로 나타난다.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만든다. 과학으로 새로운 사실을 밝히려 노력하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 코드를 짠다.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은 어떠한가.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것도 일종의 창조 행위이다. 이러한 창조 활동들은 인간에게 만족감과 성취감을 준다.

인간에게 만족감과 성취감을 주는 행위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창조는 ‘내’가 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나의 생각이 녹아 있는 나의 이야기일 때 그러한 감정을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가의 사회적 창조 행위는 밈을 퍼뜨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노력(?)을 통해 창조된 아이와 사회적 노력을 통해 창조된 결과물은 본질적으로 같다. 모두 나로 부터 출발한 정보이다. 우리는 뼈속 깊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인생의 거대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삶의 기쁨과 만족을 얻는다. 그러한 기쁨과 만족은 무언가를 성취해 냈을 때도 느낄 수 있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 읽고 있다거나 내가 설계한 집에 누군가 즐겁게 살고 있을 때 말이다. 애착이 생기고 즐거움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어떤 것을 종종 ‘아이’에 비유한다.

분명 우리가 원한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다. 자연이 짜놓은 각본이다. 이 각본 속에서 나의 목적은 “나라는 정보”를 퍼뜨리는 것이다. 이 목적은 무언가 창조할 때 달성된다. 그것이 생물할적 창조이든, 사화적 창조이든 말이다.

시간을 들여 기꺼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행동은, 내 삶의 목적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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