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와 싫다를 넘어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처음 원초적으로 접하는 감정은 ‘좋다와 싫다’이다. 생존을 위해 유전자 깊숙이 내재된 이 자동 프로세스는 나라는 개체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순간적으로 판단해 준다. 이런 ‘순간적 판단’ 덕분에 우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위험을 빠르게 감지하고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프로세스는 만능이 아니다. 판단의 속도를 중시하는 탓에 성급히 단정짓고 일반화시킨다. 게다가 이렇게 부족한 근거를 바탕으로 도출된 판단 결과를 쉽게 바꾸지도 않는다.

이를 사람 관계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을 구별하며, 한 번 내려진 판단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첫만남에서 만들어진 첫인상이 상대를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다고 여기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판단은 사실 온갖 편견과 편향이 버무려진 상태이다.

조금 다행스러운 사실은 우리가 사회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또 다른 기준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기준이다. 어떤 목표를 향해 상대방과 협동하다보면 경험을 통해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된다. 함께 놀 때의 맴버와 함께 조별 과제를 수행해야 할 때의 맴버는 다르지 않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긴 여행을 함께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비호감이지만 나의 일에 함께 해 주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좋다-싫다’ 는 기준과 ‘함께 할 수 있다-없다’는 기준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인식해야 한다. 이를 잘 구분하지 않으면 절친한 친구와 함께 사업을 하다 서로 원수가 되거나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했다가 파국을 맞는 쓰린 경험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이를 잘 구분한다면 싫어했던 사람이지만 함께 일하다 친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특히 연애와 결혼은 양자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이벤트이다. 연애의 상대는 ‘좋다-싫다’의 기준으로 결정되지만 결혼 상대는 ‘함께 할 수 있다-없다’는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 상대가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더 없이 좋지만 하루 하루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없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연애 상대와 결혼 상대를 달리 하라는 말은 아니다. 연애는 함께 노는 것에 가깝고 결혼은 함께 일하는 것에 가깝다. 양자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같이 할 상대에 대한 기준도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기준 사이에서 우리는 성장의 기회를 얻는다. 좋아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함께 해 나갈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좋다-싫다’로만 구성되었던 나의 인식 체계는 한 층 업데이트 될 수 있다. 내 판단의 편향을 인식할 수 있고 본능을 바탕으로 빠르게 이루어진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재고할 수도 있다. 이런 피드백을 통해 ‘좋다-싫다’의 판단 결과는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그 결과 경험이 많아질 수록 ‘좋다-싫다’의 기준과 ‘함께 할 수 있다-없다’는 기준은 서로 가깝게 다가가는 것 같다. “과연 나에게 좋은 사람이란?”에 대한 기준이 바뀌기 때문일 터이다. 더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나에게 잘 해 주었던 그 사람이 나를 망친 사람일 수도 있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의 행동이 차가운 사랑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인간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멀리해야 할 사람도 있고 평범하지만 배울 점이 많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쉽게 교정할 수 없고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나의 판단이 불완전하며 편향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아는 것이 어른의 증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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