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망치지 않을 조건:팩트 합의로부터

배경

우리나라는 토론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토론 문화가 희박하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제도적으로는 무슨 위원회 무슨 자문회 등등 의사결정 단계마다 토론을 위한 회의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 토론은 대부분의 경우 본래 의미와 달리 힘의 논리에 따라 이미 정해진 답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요식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다보니 주최하는 사람은 귀찮아하고, 참석하는 사람은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다.

토론은 비효율적이다. 느리고 지루하다.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고민하고 최선의 결과를 만드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꺼이 이 비용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토론에 사회적 비용은 비용대로 투입하면서 토론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잘 얻지 못하고 있다.

왜 우리의 토론은 이렇게 “답정너”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일까. 토론의 방법, 의사 소통 방식, 설득과 합의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토론을 생활화하고 토론에 대한 충분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물론 학교에서 토론 시간이 있지만, 대부분 선생님께서 결론을 맺어 주시기를 기다리는 모양이 된다. 토론이라는 형식은 있지만 정해진 답이 있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망치지 않는 토론의 조건

토론을 잘 하는 것은 어렵지만 토론을 망치지 않는 일은 보다 간단하다. 바로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토론의 목적과, ▲기본 개념의 정의와,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모두 합의하면 된다. 특히 이 가운데 마지막 사항, 즉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동의”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

의견은 달라도 현재의 상황, 팩트의 확인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므로 치열하게 논쟁하기 전에 팩트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팩트에 서로 동의할 수 없다면 그 토론은 하나마나한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토론 전 팩트 체크는 억지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억지스런 주장은 편향된 근거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팩트 체크를 통해 편향된 근거를 제시할 수 없게 되면 불필요한 언쟁을 줄 일 수 있다.

예시

예를 들어 최근 기업 법인세 인하에 대한 이슈가 있었다(기사1). 그렇다면 현재 대기업 법인세가 높은가 낮은가에 대한 사실 확인이 중요하다. 현재 상황에 합의하면 이후 토론은 한결 쉬워진다. 하지만 이 과정을 생략하면 동의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서로 같은 말만하며 논의가 제자리에서 맴돌기 쉽다.

그렇다면 팩트는 무엇일까. 주장하는 이가 제시하는 근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인세 문제도 그러하다. 법인세 자체만 보면 OECD 평균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법인세 최고 세율은 25%인데, OECD 평균은 21.5%이기 때문이다(기사2, 기사3, 기사4). 국제 사회에서 경쟁해야하는 우리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세율을 내려야 할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 경제를 이끌고 있는 대기업이 실재로 내는 세금, 즉 실효세율은 그보다 낮다. 2017년을 기준으로 소득 상위 10대 대기업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16.2%에 불과했다(기사5). 이는 중견기업의 실효세율보다 낮은 것으로, 대기업이 중견기업보다 실효세율이 낮은 “역진 현상”은 2020년에야 겨우 해소되었다(기사6).

자, 만약 이런 팩트 합의 없이 토론을 진행해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법인세 인하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최고 세율”을 기준으로 주장을 펼칠 것이고, 법인세 유지나 강화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실효세율”을 기준으로 주장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모두 “세율”이라는 단어를 쓸 것이고 양쪽은 서로의 근거가 잘못되었다면 다툴 것이다.

하지만 토론 전에 “최고 세율”과 “실효 세율” 개념에 대해 공유한 다음, 이상의 팩트들을 모두 함께 검토한다면 어떨까. 토론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용어의 혼란도 없을 것이고, 편향된 근거를 일방적으로 제시할 수도 없게 된다.

결론

토론을 잘 하는 방법은 많다. 하지만 토론을 망치지 않기 위한 조건은 단순하다. 토론 전에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팩트를 함께 공유하는 일이다.

... ... ... ...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