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운명, 우연, 신 그리고 나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서점에 쌓인 많은 책들이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를 결정하는 변수를 우연과 노력이라고 단순화시킨다면, 사람들의 견해는 우연과 노력이 각각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의견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이에 대한 생각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는 “운칠기삼”이 진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곧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 때 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연이 70%, 노력이 30%이 아닐까. 때때로 나와 주변 사람들의 일을 보면 이 30%도 지나치게 노력의 편을 들어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관점을 바꿔보자. 분명 세상의 나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알 수 없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존하고 번식해야 한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이 현상을 감정이 풍부한 이들은 ‘운명’이라고 말하고, 보다 냉철한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치부하며,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이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만약 누군가 물에 빠졌는데 내가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가깟으로 그를 살렸다고 해보자. 그를 살린 것은 ‘나’인가 아니면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의도한 ‘신’인가. 정신을 차린 그가 내가 아닌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면 나의 노력은 적어도 그에게는 30%의 기여도 인정받지 못한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영화제에서 좋은 작품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감독이 모든 영광을 신에게 돌린다고 말했다고 해보자. 종합 예술이라고 불리는 만큼 하나의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감독을 비롯해 많은 배우들과 스텝들의 노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이 영화의 성공은 신의 배려일까 많은 사람들의 노력 때문일까. 이 영화의 성공에 지분을 나눈다면 신과 인간은 얼마씩 나누어가져야 할까.

장난감 블럭으로 집을 만들고 있는데, 옆에 어린 조카가 자기에게 달라며 떼를 쓴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인심 좋게 줘 버리고 새로 다시 만들 것이다. 신의 도움 없이도 다시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력가가, 권력자가 자신의 재력이나 권력을 2세에게 승계하려는 시도는 그들의 성공이 우연의 산물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우연의 도움 없이도 성공을 필연으로 만들어낼 능력을 확신한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더 편리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다시 도전해서 전보다 더 좋은 성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답은 없다. 다만 입장을 정해야 한다. 우연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자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연에 얼마나 기댈지 결정해야 한다. 우연에 많이 의존한다면 우연은 그 순간 ‘신’이 된다. 우리는 ‘신’의 계획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나의 실패도 나의 성공도 모두 신의 계획의 일부이다. 우리가 온전히 이렇게 믿는다면 우리 사회는 아름다울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타인의 실패를 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도움을 주고 댓가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댓가가 없더라도 신의 영광을 위해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종교가 주는 순기능이다.

반대로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모호해진다. 그 모호함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 하므로 겸손해진다. 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나와 타인의 노력이 우연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몸부림임을 알기에 서로의 노력을 소중하게 여긴다. 다만 노력이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기에 나의 성공은 운이 좋아 생긴 선물이고 타인의 실패는 운이 나빠 생긴 비극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때때로 적당히 편의에 따라 우연을 인정하기도 하고 인정하지 않기도 할 때 생겨난다. 나의 성공은 나의 노력의 결과이고 타인의 성공은 우연의 산물이다. 나의 실패는 나의 운이 나쁜 것이고 타인의 실패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나의 잘못은 신에게 참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타인의 잘못은 내가 심판해야 한다. 타인의 도움은 신에게 감사하고 내가 도운 일의 감사는 내가 받아야 한다. 이렇게 편의에 따라 생각한다면 말이다.

삶이라는 황야에 서서 우연이라는 바람을 맞으며 한 발 한 발 내딪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따뜻한 신의 품 속에서 그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의 종으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두 삶은 모두 올바르며 비슷한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양자를 자기 입맛에 맞게 섞으면 문제가 된다.

... ... ... ...
Back